화요일, 3월 01, 2016

라면을 끓이며 - 김 훈

나는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대장장이가 쇠를 벼르듯이 그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쓰면서 거쳤을 고민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존경한다. 그러나 이 산문집의 첫글 "라면을 끓이며"는 실망스럽다. 이 글에서 나는 또 다른 밥 벌이의 지겨움을 읽는다. 라면의 매출량을 찾아 인터넷을 뒤져 글의 분량을 맞춰야 하는 그의 지겨움과, 이런 글을 과거의 글과 합쳐 책을 만들어야 하는 출판사의 지겨움.

이러한 실망은 단순히 문체나 장단의 차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가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간명한 휘모리 장단의 문장을 조금 더 좋아하지만 "한없이 뻗어가는 스물네 박자짜리 진양조"의 그의 에세이 문장도 역시 좋아한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글과 박경리 선생에 대한 글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앉아 김밥을 먹는 쓸쓸함"이 글과 조화되어 "맛의 심층"을 이루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덜 절여진 장아찌 같다.
하아~~~! 하지만 어쩌란 것이냐! 그의 말처럼 밥벌이에는 대책이 없다.

쓰고보니 아주 박한 독후감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수록된 글 하나로 전체 산문집을 깎아 내린 꼴이 되어 버린... 아마도 좋아하는 작가의 새 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나 보다. 책에 수록된 "세월호"라는 글--아쉽지만 이 글도 그의 새 글은 아니다--에서 좋았던 부분을 조금 옮겨 적는 것으로 황망히 글을 수습한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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